영화 회사에 다니는 일꾼들은 종종 완성되기 전 편집 과정에 있는 영화를 보게 됩니다. 시나리오 검토 단계를 통해 이야기는 익숙히 파악하고 있지만, 각자의 머릿속으로 상상해 본 이미지는 모두 다르게 마련입니다. 편집본 시사는 과연 이 이야기가 스크린에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을지 살짝 엿볼 수 있는 업무 단계이기도 한데요. 한 영화의 편집본을 처음 보기 전엔 사실 조금 긴장되기도 해요. 개봉 전부터 몇 달 간 최대한 몰입할 수 있을 만큼 일꾼의 마음에 닿는 영화로 나아가길 간절히 바라며 시사실에 입장하곤 하죠. 홍보 일꾼도 <왕과 사는 남자>를 처음 내부 시사실에서 관람했던 날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훌륭한 연기력의 배우들이 신선한 조합으로 뭉쳐 기대가 있었지만, 새로운 만큼 그 호흡이 어떨지 몹시 궁금했어요.

영화는 고문 속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지르며 한명회를 향해 통한의 경고를 내뱉는 신하들, 그 악몽 같은 소리를 들으며 텅 빈 눈으로 앉은 상왕 이홍위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절망과 간절함이 함께 깃든 목소리로 이홍위와 관객의 마음을 동시에 노크하는 대사가 들려옵니다.

“상왕 전하”

“드셔야 하옵니다.”

‘와 된다. 이건 된다…!’ 매화의 짧은 대사를 듣자마자, 홍보 일꾼 내적 고함을 질렀습니다. 매화가 내뱉는 첫 대사로 인물의 감정이 놀랄 만큼 압축적으로 다가와서, 영화에 빠르게 마음을 빼앗겼거든요. 제가 극장 관객이어도 바로 몰입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아직 미완성의 버전이라 해도 영상화 된 <왕과 사는 남자>를 만나는 건 처음이었는데, 매화의 대사 한 마디만으로도 이 작품이 보여줄 균형감이 확실히 느껴졌던 것 같아요.

물론 피폐한 얼굴로 상을 물리라 소리치는 이홍위 역 박지훈 배우의 모습이 이어지고, (이홍위 역을 위해 부쩍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크랭크인 행사에서 처음 인사를 나눴었는데, 몇 달 뒤 스크린을 통해 그간의 여정을 확인하니 등장부터 마음이 뭉클하더라고요) 이내 그 앞에 들이닥쳐 비릿한 미소로 두 사람을 긴장케 하는 한명회 역 유지태 배우*(천년의 이상형이 한명회가 된 모습을 처음 목격해 충격에 빠진 그 날이 바로 이 날임)*의 등장까지, <왕과 사는 남자>는 첫 시퀀스부터 배우들의 연기로 깊은 안정감과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lnJ7bKAI2GWIRwu-tFF77JCnpqVf1gtI/view?usp=sharing

무대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쳐 왔고 드라마 시리즈를 통해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사극에서 만날 전미도 배우의 연기가 어떨지 사실 잘 상상이 되지 않았는데요. ‘역시는 역시’더라고요. 그 눈빛과 목소리. 울부짖을 수도, 담담할 수도 없는 심정이 조용한 절망의 숨으로 어절의 사이 사이에 배어 있는데, 제 입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어요.

지난한 유배길은 물론, 유배지에 도착해서도 홍위의 모든 일상을 함께 하는 매화는 광천골 사람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궁 안에서 볼 수 없었던 미소를 보여주기도 합니다.(하지만 전 매화가 웃으면 눈물이 나는 병 걸림) 이홍위가 아주 작은 아기였던 시절부터 곁을 지켰을 매화는, 서신에서처럼 홍위의 벗이고, 누이고, 어머니였습니다. 그 중에도 이었다는 말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지요.

영화는 매화와 홍위 둘만의 대화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두 인물 간의 신뢰와 애정은 마치 이야기의 바탕에 원래부터 존재해 온 것처럼 자리합니다. 눈만 보아도, 손끝만 보아도 이미 서로의 마음을 아는 매화와 홍위의 관계를 전미도와 박지훈, 두 배우는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완성해 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관풍헌 앞에 엎드린 흥도에게 작은 돌을 던지던 매화의 마음이 과연 어떤 것이었을지, 매화는 그 날 홍위의 마음을 어디까지 읽어냈을지, 또 홍위는 어디까지 감추려 노력했을지까지도 상상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잠시 과몰입에서 벗어나 전미도 배우가 <왕과 사는 남자>에 매화 역으로 출연을 결심했던 때로 돌아가 볼게요. 장르와 형식을 가리지 않고 다채로운 작품을 통해 탄탄한 연기력을 인정받아 온 전미도 배우는 영화계에서도 많은 러브콜을 받고 있는데요. 배우의 존재감에 비해 <왕과 사는 남자>의 매화 역은 조금 비중이 작아 보일 수도 있었어요. 물론 전미도 배우가 출연을 확정하면서, 매화 캐릭터는 대폭 수정되어 보다 입체성을 띠게 됩니다. 미도 배우는 매체 인터뷰를 통해 **“시나리오를 읽는데 이야기가 너무 좋았다”**며 **“분량은 중요치 않았다. 이미 캐스팅이 확정된 배우들과 함께 연기할 수 있는 것이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고 말했죠. 영화의 개봉 전 진행되었던 메이킹 인터뷰에서 미도 배우는 매화 역을 준비한 과정을 이렇게 돌이켰습니다.

아무래도 매화는 단종의 어머니 같기도, 누이 같기도 한 유일한 가족 관계 같은 느낌의 캐릭터여서 기본적으로는 따뜻한 인물이었어요. 대신 장항준 감독님은 너무 정형화된 느낌은 원치 않으셨어요. 기본적인 인간미에 더해 그 인물로서 전혀 하지 않을 것 같은 어떤 돌발적 행동이 나올 때 이 역할이 더 매력적이지 않을지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눴죠. 대본 상에는 없었지만 단종을 지켜내야 하고, 보호해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더 까다롭게 군다든지, 가만히 있을 것 같으면서도 또 적극적으로 나섰던 그런 모먼트들이 좀 있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ntR5JOhz3p7lr0bQ2EYgLQvqP1dEek78/view?usp=drive_link